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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의 잔치가 되버린 퓨전사극

한창 ‘장옥정, 사랑에 살다’라는 드라마가 화제였다. 처음부터 김태희가 연기하는 장희빈+ 유아인의 조합이었으니 기대했던 사람들도 많았을텐데.. 작가님과 감독님은 역사고증을 왜 안하시나요? 조선시대에 하이힐같은 꽃신은 왠 말이며 마네킹에 이번에는 스탠딩파티까지 나왔다면서요? 하면서 열내던 게 우스워졌다. ‘기황후’같은 드라마가 공중파에서 버젓이, 언제나 칭찬받던 그 여배우의 주연으로,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면서 방영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어쩌면 “실제인물인 장옥정을 중심에 둔 현대적 퓨전사극을 찍어보자!” 뭐 이런 기획의도를 가지셨을지도 모르겠으나 정도가 심하신듯하다. 내가 역사학자였거나 전공하는 학생이었다면 심히 화났을듯.


그러고보니 정통사극과 퓨전사극의 정확한 경계는 뭔지 생각해보게 된다. 뭘까? 실존인물이 등장하면 정통사극이고 아니면 퓨전인가? 구미호같은 판타지가 등장해야 퓨전사극드라마인가? 여러모로 애매모호하네.


‘용의 눈물’이나 ‘명성황후’같은 사극드라마를 보며 국사공부에 도움을 꽤 받으며 학창시절을 보낸 한 사람으로써, ‘퓨전사극’이라고 할꺼면 이렇게 만드시라고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역사고증을 담당하시는 분께 보여주고 싶은 퓨전사극드라마.


 


구가의 서

신우철 연출, 강은경 극본 이승기, 수지 주연



공교롭게도 ‘장옥정, 사랑에 살다’와 동시간대에 방영되고 있는 경쟁작. 반인반수! 제대로 판타지 돋는 캐릭터가 등장하니 당연히 퓨전으로 분류. 그나저나 이승기는 전생에 구미호랑 무슨 인연이 있었나보다. 전에는 신민아처럼 예쁜 구미호여친을 만나더니 이번에는 수지같이 예쁜 여인네를 지켜주는 남자구미호가 되었네.


 


 

신의

김종학 연출, 송지나 극본 이민호, 김희선 주연



공민왕이 등장한다는 설정에서 살짝 헷갈리지만, 21세기의 여주인공이 타임슬립을 하기에 이것도 정통사극은 절대 아님. 덕분에 인물들이 여기저기 날라다니고 주술같은 걸 써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공민왕과 관련된 역사적 내용도 훼손시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역사학도가 아닌지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랑사또전

김상호 연출, 정윤정 극본 신민아, 이준기 주연



구미호에 이어 귀신을 연기하신 신민아. 한맺힌 처녀귀신과 그녀를 볼 수 있는 남주인공, 거기에 저승사자, 옥황상제, 염라대왕까지! 민담을 모티브로 제작된 만큼, 제대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 ‘조선시대 판타지 로맨스 활극’이었지만 서얼인 주인공을 통해서 신분사회의 상처도 보여주고, 지방 탐관오리들의 부패도 보여주고. 설정은 판타지일지라도 조선시대라는 배경을 왜곡하지 않고 잘 살려서 더 재밌게 볼 수 있었다.


 


 


추노

곽정환 연출, 천성일 극본 장혁, 오지호, 이다해 주연



이 드라마도 많이 망설였는데, 열심히 찾아본 결과! 노비 추쇄에 양반이 사적으로 전문 추노꾼을 고용하지 않고 관청의 힘을 빌렸다는 점은 드라마와는 상치되는 것이며, 문서를 발견 및 공개한 한국학중앙연구원측 안승준 책임연구원은 조선이 전형적인 양반 사회였음과 동시에 드라마「추노」가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상상의 산물’임을 보여준다고 발표했다. 라고 한다.


실제의 역사를 바탕으로, 그 역사를 훼손시키지 않고! 아주 잘 만든 드라마. 장혁 오.. 아니 아저.. 아니 배우님, 차기작 언제 찍으시나요?


 


 


해를 품은 달

김도훈 연출, 진수완 극본 김수현, 한가인 주연



여진구, 김유정, 김소현이라는 아역들의 열연에 힘입어 김수현을 인기스타대열에 올려주고 임시완에게 광희뺨치는 인지도를 안겨준 화제작, 해품달.


원작소설의 글쓴이가 밝히길 ‘조선의 가상 왕 시대’라 하였으나 왠만한 역대 사극만큼이나 조선시대의 느낌이 잘 살았던 드라마. 함정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정말 푹 빠져서 봤었지. 원작자는 ‘실제로 있을법한 허구’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잘 활용하는 작가인 것같다. 해품달 이전에도, 아래의 드라마도 이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걸 보면 말이지.


 


 


성균관 스캔들

김원석 연출, 김태희 극본 박유천, 박민영, 송중기, 유아인 주연



조선시대의 성균관이라는 실제장소를 배경으로 그 곳에 정말 다녔을법한 가상인물들의 이야기를 보여준 소설원작 드라마. 실제 역사 속 인물이라고 해도 왠지 믿음직한 인물들과 사건들. 노출을 꺼리신다는 작가님, 만나뵙고 싶다.


다들 이전에도 인기있었지만 이 드라마 이후 제대로 스타가 되셔서, 성균관유생이었던 세 배우들이 모두 조선의 왕이 되셨더라. 박유천은 ‘옥탑방 왕세자’에서, 송중기는 ‘뿌리깊은 나무’에서, 그리고 유아인은 바로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인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말이지. 뭔가, 신기해.


 


 


태왕사신기

김종학 연출, 송지나 극본 배용준, 이지아, 문소리 주연



실존인물이자 한반도 最古의 영웅, 광개토대왕을 주인공으로 함과 동시에 “사신에 의한 판타지 즉, 광개토대왕과 함께 고구려 강서고분벽화의 사신도에 그려져 있는 사신을 드라마 속에 등장시켜 판타지적인 요소를 가미”시킨 판타지서사드라마.


기획단계에서부터 판타지를 바탕에 뒀고, 그마저도 강서고분벽화라는 실제 유물에 그려진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아무래도 조선시대보다 훨씬 오래된 시대의 이야기이다보니 구체적인 역사고증이 힘들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덕분에 사진 속 문소리의 의상을 비롯해서 다양한 장치들이 거슬리지 않았던 것같기도.


 


 


쾌도 홍길동

김영조 연출, 홍정은 극본 강지환, 성유리 주연



성유리가 여주인공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제2의 ‘천년지애’가 되면 어쩌나 엄청 걱정했지만! 안봤으면 후회했을 ‘쾌도 홍길동’ 다른 사극에서도 중간중간 재미난 조연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웃기는 시대극은 처음이었다. 강지환만큼 능청스럽게 능구렁이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몇이나 있을까? 물론 홍자매의 감칠맛나는 대사들덕분이기도 했겠지?


홍길동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린 실존인물이지만, 소설 ‘홍길동전’에서도 그러하듯, 이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을 모델로 삼아 창작된 인물이다. 그것도 코믹하게 창작된. 그러니 만약 이 드라마의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이 홍길동이 아니라 홍삼동이라고 했어도 마찬가지로 재밌게 보지 않았을까?


 


 


장옥정, 사랑에 살다

부성철 연출, 최정미 극본 김태희, 유아인 주연



반면 이 드라마는 어딘가 알쏭~달쏭~하다. 분명 ‘태왕사신기’라던가 ‘쾌도 홍길동’도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면서 실제 역사와는 다른 장치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왜 유독 ‘장옥정’만 이토록 위화감이 드는걸까?


나름 생각을 해봤는데, 우선 역사 속 인물들 중에서도 장옥정이라는 그 여인도, 그 여인이 살던 시대적배경도 너무나 잘 알려져있다. 이미 몇 차례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역사적 고증이 완료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갑자기 그걸 무시하고 인형놀이를 하고 있으니 반감이 드는 걸지도.


그리고 방영 전부터 제작진은 ‘장옥정이라는 인물에 대한 오해를 풀고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겠다’는 역사적사명을 가진듯한 홍보를 대대적으로 했었다. 실제로 이전 드라마에서 보여진 장옥정의 악녀적 이미지는 사실과 다르다는 역사적 견해도 있고하였기에 그 ‘다른 각도’ 또는 ‘진짜 장옥정’의 모습에 기대하고 있었는데 생뚱맞게 시대적배경을 깡그리 무시한 장치들이 수두룩하게 나오니 황당할 수밖에.


“조선시대에 패션 디자이너가 있었다면 어떨까? 그 여자가 당대의 왕과 사랑에 빠지는 궁중러브스토리는 어떨까?”라는 발상을 한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의 제목부터 바꾸는게 순서가 아니었을런지.


정작 ‘장옥정, 사랑에 살다’도 아니고 ‘구가의 서’도 아니고 혜수언니의 ‘직장의 신’을 보며 감탄하는 중인데,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 몇 장만 보고도 어이가 없어서 급하게 드라마찾고 사진찾고 검색해봤다. 여주인공의 하이힐같은 꽃신과 궁궐인지 양반집 마당인지에서 펼쳐지는 야외스탠딩파티장면을 봐서는 조만간 제작진이 “사실 이 드라마는 퓨전사극입니다”라고 말할 것만 같아서. 아니라고!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구요!





+ 한창 ‘장옥정’의 어이없는 연출로 홧김에 쭉쭉 두들겨썼던 글이다. 근데 이제와보니 장옥정은 양반이었다싶네. ‘기황후’에 비하자면 ‘장옥정’은 장난이었지. 국민호감의 절정을 달리던 여배우가 그런 역사 속의 인물을, 그런 식으로 미화시키는 캐릭터를, 아주 열심히 옹호하고 포장하며 연기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씁쓸하다. 대만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방영되고 있다는데.. 이런 걸 역사와 민족을 팔아먹는거라고 하는거구나.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