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상대방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는 습관을 가져라, 하는 게 우리 부모님의 입버릇이었다. 거창하게 가훈이라고 할만한 명제는 아니지만 한 살 한 살 나이가 먹어가며 이런저런 일을 겪다보면 별 것아닌듯한 이 한마디가 도움이 된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 한 곳의 장소에서 펼쳐지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복잡한 시선들.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그런 참신한 시각이랄까.. 지금껏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시점으로 세상을 비춰주면 참 많은 걸 느끼게되고, 생각하게 된다.
무엇이 평범한 것이고 무엇이 다수의 삶인지는 생각할 수록 답이 없지만, 분명 나와는 다른 삶들. 평소에는 생각치 못했던 시각을 보여준 영화들.
GO
날 일본영화 오타쿠로 만들어버린 최초의 영화를 콕 집어 한 편만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는 꼽을만한 영화 쿠보즈카 요스케의 "GO"
이 영화가 개봉했던 당시만해도 일본에서의 재일교포를 향한 시선은 참 냉소적이었다던데, 지금은 한류열풍으로 우리나라 연예인들이 일본에서 큰 사랑을 받는다니.. 새삼 놀랍네.
영화의 주인공은 재일교포3세.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북한사람. 하지만 그는 일본인도 아니고, 북한사람도, 남한사람도, 한국인도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따위 생각도 해본 적없는 나로서는 이 남자주인공이 놓인 상황이 참 경악스러웠다. 놀랍다거나 충격적이었다는 말로는 부족한, 말그대로 경악.
지금도 일본에는 많은 교포들이 살아가고 있겠으나 옛날만큼 눈치를 받거나 미움받지는 않을 것같다. 서류에 적힌 국적이 한국이든 일본이든,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실히 찾아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이 영화에서 쿠보즈카 요스케.. 참 멋졌는데..비쥬얼이?ㅎㅎ
He Loves Me
아멜리에라는 영화 한 편으로 세계의 상큼이가 된 오드리 토투. 그 영화 바로 다음이 이 영화였던가? 'He Loves Me'라는 영화의 포스터도 전작만큼이나 왠지 달달해보였다. 장미꽃더미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여주인공. 제목도 포스터도 마냥 러브러브의 분위기가 물씬나서 덥석 골라왔던 비디오였는데...
아~주 순수한 사람이 아~주 강하게 누군가를 짝사랑하게 되면, 이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될런지도. 그저 바라만 보면서 끙끙 가슴앓이하는 것보다는 행복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 짝사랑의 상대가 알게 된다면 오싹하겠지만.ㅋㅋ
메종 드 히미코
이토록 멋진 노신사들의 가슴 속에는 우아하고 섹시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멋진 여성들이 살고있다. 보통 여자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아주 예쁘고 멋진, 완벽한 여자가.
'메종 드 히미코'의 표면적인 주인공은 오다죠와 시바사키 코우이지만 사실 진정한 주인공은 히미코와 그의 친구들.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게이들. 참으로 영리한 인물구성.
한창 미모(?)를 뽐내는 오다죠같은 게이가 아니라, 젊었을 적 함께 게이바에서 일하던 늙은 게이들의 현재, 라는 부분이 이 영화를 감동적으로 만들었다. 특히 어쩔 수없이 가족들에게 돌아가야만하는, 더이상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게이일 수도 없는, 치매환자가 되버린 루비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백미가 아닐런지.
타인의 삶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셀 수없이 많은 전쟁들.. 언뜻 평화의 시대에 도래한 듯보이는 현재에 그 전쟁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주로 '피해자'이다. 본인들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운명'적으로 전쟁에 휘말려야 했던 사람들의 눈물 쏙 빼는 이야기들.
아니면 반대로 전쟁을 일으킨 쪽의 사람들을 살벌하게 묘사해내거나. '타인의 삶'을 보기 전, 내 머릿속에는 전쟁=피해자+가해자 라는 공식이 있었다. 비중은 물론 피해자가 컸고. 어찌보면 전쟁이라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까지 자세한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그저 '나는 한국인, 한국은 일본놈들에게 나쁜짓을 많이 당한 나라' 정도의 단순무식한 부끄러운 시점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국적이 어느 나라이든, 전쟁을 처음 일으킨 나라가 어느 곳이고 누구이든 간에 그 시대를 살아야만하는 사람들은 모두 피해자인걸..
쉰들러리스트의 주인공이 그저 마음이 착하고 인간미가 넘쳐 유대인들에게 미안해하고 자선과 아량을 베푼 영웅이라면, 타인의삶의 주인공은 적군도 아닌 아군의 상사들, 그들로부터 받은 임무로 인해 인간성 그 자체를 잃어야만 했던 불쌍한 사람. 전쟁이 끝났음에도, 자신이 감시하던 그 사람들은 평화로 돌아가려 안간힘이라도 쓸 수 있지만, 이 주인공은 그럴 수도 없을 것같아 마음이 아팠다.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
이런 비슷한 류의 작품들이 요새 부쩍 나왔던 것같은데.. 기억이 안나네. '범죄자의 가족'과 그들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 '아무도 지켜주지않아'
특히 매 분기마다 세네작품을 꼬박꼬박 챙겨보는 일드에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하기에 요즘들어 생각해보게 되었지만, 이전에는 관심 자체가 없었다. 뉴스에는 언제나 가해자와 피해자만 등장하니까. 그들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영화는 가해자의 가족, 그리고 그 가족을 지키는 형사 - 맞나? 기억이 가물가물;; -의 이야기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아니, 다른 나라라도 아마 그렇겠지만 극악무도한 살인사건을 일으킨 살인범의 가족들은 함께 눈총을 받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왜냐면, 가족이니까.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저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나'싶다가도 '그래도 그 살인범의 가족이라면...'이라는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실제로 나의 가족 누군가를 살해한 사람의 가족을 난, 용서할 수 있을까? 반대로, 나의 가족 누군가가 살인을 저질렀다면? 살해당한 사람의 가족들은 날 용서할 수 있을까? 끝나고나서도 영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던, 하지만 보길 잘했다고 생각한 영화.
일드 중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꽤 많다. 대표적으로는 '그래도 살아간다'가 있고 '스트로베리나이트'같은 범죄물이 등장하는 드라마에서 에피소드로도 종종 등장한다. 조금은 다르지만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라는 영화도 나한테는 신선한 시각이었다. 보는 내내, 다 보고나서도, 답답해서 슬펐을 정도로.
오아시스
'아, 저런사람들을 보고 연기파배우라고 하는거구나'했던 설경구와 문소리 주연의 '오아시스'
개인적으로 난.. 너무 리얼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쉽게 말하자면 홍상수감독님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다큐와 몰카를 섞어놓은 듯이 느껴지는 영화들. 영화라도, 소설이라도, 드라마라도, 만화와 음악이라도, 현실보다는 좀 더 달콤하고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유치해도 좋다. 그걸 보고 듣는 동안만이라도 신기루속에서 살고싶달까.
그래도 확실히 명작들은 그런 취향을 넘어서는 메세지같은게 있어서 안볼 수가 없더라는. 이 영화도 그랬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은 꼭 보라며 추천을 하는데, 줄거리를 대충 듣고나니 썩 보고싶지가 않았다. 괜히 쓸쓸할 것같고, 씁쓸할 것같았으니까.
그래서 몇 달을 미루다가 보고싶은 마음으로 근질거리는걸 참지못해 봤다. 영화가 끝나고, 다시 봤다. 그리고, 다시 봤다. 그렇게 다섯 번쯤을 연달아 봤던 것같네. 두고두고 한 번씩 보는 영화들은 많았지만 처음보고나서 바로 연달아 몇 번이고 본 영화는 오아시스가 유일하다.
모든 장면과 설정이 아련하면서도 리얼하고 예쁘면서도 슬펐지만 압권은 저 장면. 여주인공의 머릿 속 느낌이 그대로 보여지는 것이라고 내맘대로 해석한 저 장면, 참 좋더라.
이런 소리를 하면 벌받겠지만.. 한번쯤 오아시스 속의 문소리가 되보고 싶다. 지금의 내가 무서워하는 감정보다 훨씬 더 깊은 경계심과 두려움을 갖고 살아야하겠지만... 그만큼 더 진하게, 더 황홀하게 행복함이라는 감정을 느껴볼 수 있을 것같아서. 이런 바램조차도 무지에서 오는 헛소리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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