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음은 어쩜 이리도 간사한건지.
매일같이 같은 공간을 드나들며 먹고,일하고,자고,먹고,일하고.. 그런 지리한 일상을 보내고있노라면 당장이라도 짐도 싸지않은 채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지만, 막상 지겹던 일상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살짝 초조해지기도 하고, 불안해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일상에 중독되어 버린 느낌.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나 여행, 특히나 촘촘히 짜여진 일정의 '여행'보다는 어디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없는 '떠남'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환상,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한 두근거림. 다양한 이유로 '여행'이 아닌 '떠남'을 시작하는 여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오랜만에 곱씹어봤다.
라스트 홀리데이
근검절약과 근면성실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던 여주인공. 그녀의 짝사랑이 이루어질까말까한 가슴설레이는 순간에 찾아온 시한부선고. 그렇다, 정말 제대로 식상한 설정의 이야기. 얼마 전 종영했던 드라마 '여인의 향기'를 보면서도 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했었지.
그 드라마에서 김선아가 유행시킨 버킷리스트는 이 영화에도 등장한다. 짝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사진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요리사의 레시피도 모아두고, 가고싶은 곳들의 사진도 간직하는 그런 노트. 시한부선고를 받지 않았다면 노트안에만 숨어있었을 그 모든 것들을 과감히 실현해나가는 게 이 영화의 요점이다. "언제까지고 꿈꾸기만 하지말고 바로 지금 시작하자"는 명료한 명제.
아무리 뻔한 스토리라도 확실히 이런 류의 도전하고, 행동하고, 변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즐겁다. 다만,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모아놓은 돈이 꽤 두둑했다는 오점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결국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정도의 경제력은 있어야 하는걸까?
녹차전쟁
영화 '녹차전쟁'에서의 토다 에리카는, 아버지를 위해 떠난걸까? 아니면 아버지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떠난걸까? 조금 헷갈렸었다. 근본적인 목적은 물론 茶의 세계를 등지고 살아가는 아버지의 밝은모습을 되찾아 주고자함이었으나, 그 아버지와 대판 싸운 후 바로 떠나버렸기에..
이유야 어쨌든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대만행티켓까지 끊어 보내준 이의 덕택으로 그녀는 떠난다. 그 곳에서 차도 마시고, 차도 마시고, 차도 마시고.. 茶기행이라도 떠난듯 하다가 그 타지에서 다시 친구와 아버지를 만나 우여곡절끝에 가정의 화목을 되찾게되는데.
그런 내용들은 둘째치고 무일푼인 그녀에게 갑자기 날라들어온 비행기티켓 한 장. 그게 너무나도 부럽더라. 과감히 떠난 그 곳에서까지 동네친구며 못말리는 아버지를 또 만나게한 작가는 이해할 수없지만. 그래도 그 다사다난했던 여행덕택에 다시 茶를 사랑하는 아버지와 화목한 가정으로 돌아왔으니 OK지뭐.
멋진 하루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3백만원- 정확한 금액은 잘 기억이..어쨌든 애매한 금액 - 을 돌려받기 위해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을 순간, 그리고 만나기 직전까지의 그 시간동안 그녀의 기분은 어땠을까. 모르긴몰라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으리라. 씁쓸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하고, 오히려 자신이 초라해지는.. 그런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알 수없는 그녀의 여건상 부득이하게 옛 애인을 찾아갔고, 만났고, 황당하게도 그 남자 주변의 여자들에게서 돈을 받으러 다니게 되었다. 아아.. 이 얼마나 궁상맞은 상황이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 궁상맞은 상황을 함께 보내면서 새삼 느끼게 되는 그 남자의 좋은점도 보였을거다. 하물며 관객인 내 눈에도, 보였으니까.
그녀가 그에게서 빌려줬던 돈을 모두 돌려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건, 그 황당한 '돈받으러 다니는 짧은 여행'이 끝나고 그와 헤어질 때의 그녀의 표정. 도시의 밤거리를 달리는 차 안에서 기분좋은 표정으로 살짝 웃던 그녀의 표정만 기억날 뿐.
백만엔걸 스즈코
참으로 팔자가 사나운 여인네 스즈코, 우물쭈물한 성격 탓에 전과자가 되어버린 여자. 그녀가 떠난 이유는 어쩌면 동생을 포함한 가족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전과자가 된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듯 떠난 거라고 느꼈는데, 곰곰이 되짚어보면 자신때문에 손가락질받고 험담듣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바다에서의 경험도, 깊은 산 속 복숭아밭에서의 경험도, 마트 한 켠 화원에서의 경험도 물론 스즈코에게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는 걸 영화의 마지막즈음 알게된다. 영화 속 마지막 장소였던 그 곳을 떠난 스즈코는 이제 어디에서든 당찬 모습으로, 절대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고 열심히 부딪혀가며 살아가지 않을까? 어린 동생이 누나에게 보내온 그 한 장의 편지덕택에.
여자아이 이야기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오래 전, 마을을 떠났다.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추억이 있는 그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그녀는 잠시 마을에 돌아간다.
슬픈 소식을 가슴에 묻게되는 그녀의 회상장면으로 꽉 찬 스토리. 덕분에 잔뜩 기대했던 후카츠 에리의 모습은 볼 기회가 적었다. 그 부분에서는 아직도 실망감이 있다. 하지만 소녀들의 공감되는 에피소드, 그리고 슬픈소식을 듣고도 좀처럼 친구가 있는 그 곳으로 달려가지 못하는 주인공의 감정선이 진정 와닿는다.
여자들의 우정이라고 하면 다들 얄팍하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동감하는 부분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성별이 아닌 개성의 문제가 아닐까. 환경에 따라, 연령에 따라,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이 아닐까.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여자아이'는 어릴적 친구들과 살았던 그 마을에 다시금 다녀오고나서야 몰랐던 우정을 느낀다. 슬프게도.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혼자가 아닌 여행, 누군가와 함께 떠나는 여행. 생각만해도 피곤하다. 나 아닌 다른사람들에겐 그 편이 자연스러운걸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독하게도 사이가 나쁜 자매가 여행을 떠난다. 여행이라기보다.. 깍쟁이 동생의 가슴 속 아픈 구석을 치료해주기 위한 여정. 여기서도 싸우고 저기서도 싸우고. 이래도 싸우고 저래도 싸우고. 그게 리얼했다. 믿어지지 않을만큼 사이가 좋은 나의 자매들보다 이 영화의 두 자매가 훨씬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계속 싸우기만 하던 두 사람이 마침내 폭발하는 순간, 자동차사고가 생기고 몸의 상처가 생기고.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약해지는걸까? 두 사람의 속마음이 조금씩 흘러나오면서 뭔가, 포근한 기분이 된다.
공효진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신민아마저도 열심히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 그럼에도 어색하긴 했으나 - 괜찮은 영화였는데 엔딩의 그 설정. 동생의 아버지와 연결되는 설정은 감동적이고 신선하기는 커녕 우스꽝스러워져버려서 아쉽다. 그 부분만 빼면 정말 마음에 쏙 들었는데.
언니든 여동생이든 자매가 있는 누군가라면, 이 영화의 한 부분에서 '걔한테 전화해서 술이나 한잔할까'하는 생각이 들게다. 난, 기어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찾아가 맑은 술과 영광스런 소고기까지 얻어먹고 돌아왔다. :)
투어리스트
팜므파탈의 여행은 꼭 이렇게 럭셔리하고 우아하고 스펙터클해야 한단말인가.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이탈리아의 저 황홀한 풍경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 그리고 좀 귀여웠던 반전. 그래, 전형적인 헐리웃영화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남자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안젤리나 졸리는, 이미지에 맞지않게 순정파여인네. 헤어진 옛 남자로부터 날라온 한 통의 편지에 고민따위 없이 바로 이탈리아에 향한다.
이야기의 도입부가 되는 요 부분이 납득이 안가는 동시에 끌렸다. 물론 화면도 예쁘고 지루하지 않게 진행되는 스토리도 재밌다고 할만했지만 무엇보다도 그 이유. 차갑고 도도해보이는 아름다운 팜므파탈 여인네가 오로지 편지 한 통, 그것도 헤어진 옛 남자의 편지 한 통에 길을 나선다는 부분이 "말도 안돼"와 "사랑이로구나~"를 오가게 만드는.
결말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직업, 남자주인공의 반전을 알고나면 그녀가 그 편지에 적힌대로 따르는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친구도 있었지만.. 환상 속에 사는 나는 그냥 "사랑이로구나"하고싶다. 잊지못한 옛사랑의 편지 한 통에 감격하여 당장 달려간 거라고 믿으련다.
트릭
주 소재는 미스테리, 하지만 장르는 분명히 코미디. 드라마의 시리즈를 빼고도 영화로 만들어진 것만 세 번. 확실히 명작은 명작이다. 몇 번을 다시봐도 전혀 산만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드는 나카마 유키에와 아베 히로시의 매력. 그리고 츠츠미 유키히코감독 특유의 분위기도 훌륭하다.
그런 명작 트릭은 언제나 도입부가 똑같다. 엉텅구리 마술을 매번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여주인공. 그리고 집세를 독촉하는 집주인아줌마. 그 때에 맞춰서 나타나는 사이비교수와 어느 마을에 가면 돈이 된다는 솔깃한 이야기. 그렇게 시작되는 여행길은 언제나 위험천만하고 으스스하다. 그래서, 스릴이 넘치고 재미가 나며 동시에 애정도 싹트고. 집세는 제대로 받아서 돌아가는건지 언제나 마지막장면이 되면 궁금하던데.. 언급이 없더라..
어쩌면 '트릭'은 사이비남교수와 사이비여마술사의 '밀월여행이야기' 일런지도. 처음 솔깃해졌던 그 돈을 받을 수 있든없든간에 아베 히로시처럼 웃기는 남자와 스릴넘치는 사건에 휘말릴 수있다면 당장이라도 떠나보고 싶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줄리아로버츠가 그 커다란 입으로 활짝 웃는 모습은 바라보기만해도 행복해진다. 특히나 이 영화는 갑갑한 현실에서 훌쩍 떠나 제목 그대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이야기'이다보니 해피바이러스로 충만한 작품.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면서 변화한다, 는 무조건적인 해피엔딩영화는 그닥 안끌리지만, 이 영화는 조금 달랐다. 우선 그녀가 일상에서 느끼는 가슴터질듯한 답답함이 참 현실적이었고 막상 떠나서도 외로워하고, 그리워하고, 슬퍼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이 그대로 보여지는 부분이 섬세했다.
관객에게 행복한 감정을 무작정 밀어붙이지않고 서서히, 조금씩 풀린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느껴졌달까. 특히 인도의 수도원에서 만난 아저씨와 피터지게 싸우는 장면이나 이탈리아의 그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때의 모습에서는 가슴이 아팠을 정도로 몰입되기도. 주인공이 여자든 남자든 소년이든 노인이든 관계없이 '로드무비=성장영화'라는 인식을 확신시켜주었다.
유달리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주인공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스토리를 보고나면 나도 당장 어디론가 가고싶은 마음이 막무가내로 솟구치고, 현실은 그럴수없고, 그러면 되려 씁쓸해질때도 있는데,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나니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보다는 가슴 속 무언가를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편안해질 수있었다.
우유를 먹고싶다면 몸에 칼슘이 부족한 것이고, 가족이 보고싶다면 마음이 외로운 것이란다. 영화가 보고싶어질 때도 마찬가지아닐까.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보고싶다면 연애가 하고 싶은 거고, 로드무비가 보고싶다면 현실에서 훌쩍 떠나고 싶은 것. 떠나야한다!
마지막은.. 대표적인 여자들의 로드무비, 그 엔딩에서 펑펑 울꺼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몇 번이고 다시 보게되는 멋진 영화. 델마와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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