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가 참 식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빗소리가 들리면 동동주에 해물파전이 먹고 싶어지는 것처럼, '비가 내리고~음악이 흐르면~'하는 노래가사가 흥얼거려지는 것처럼, 자연스레 생각나는 영화장면들도 있다.
액션영화를 보는 사람이면 빗 속의 혈투가 떠오를테고, 나처럼 잠올만큼 심심해도 멜로나 휴먼드라마 종류만 챙겨보는 사람들은 보통.. 남녀배우들의 염장씬이 생각나는 법이지. 겨울을 코 앞에 두고 비가 추적추적 오니, 또 어김없이 생각나는 김에 다시 한번 떠올려보기.
마들렌
정말이지 어색해서 미쳐버릴 것같은 두 주인공의 연기를 참아내는 것만으로도 꽤 힘든 영화 마들렌. 두 선남선녀가 노란병아리색 우비입고 비오는 한강공원을 휘젓고 다니는 이 장면을, 지금의 조인성과 지금의 신민아가 연기한다면 제대로 사랑스럽고 배아픈 장면이 될 수도 있을까? 설정도 예쁘고 그림도 예쁜 이 부분즈음을 보다가 나는 결국, 종료버튼을 눌렀더랬다.ㅋ 나에게는 그런 의미에서 명장면이라고 할법한 마들렌의 한 장면.
번지점프를 하다
아마도 그렇게 일찍 가버리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 최고의 여배우라는 수식어가 누구보다 어울렸을 이은주. 그녀는 참, 비와 잘어울리는 느낌의 여배우였다. 어눌해보이는 한 남자가 자신의 한쪽 어깨를 흠뻑 적신채 우산을 씌워주는 그 애틋한 마음이 와닿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연애소설'이라는 영화에서는 선머슴같은 모습의 이은주가 친구들과 해맑게 미소지으면서 비를 피하는데, 그 장면도 생각이 나네.
친구
장동건이 비주얼만 그럴싸한 배우가 아니라, 볼만한 연기도 할 줄 아는 배우라는걸 알려준 영화 친구. 태극기 휘날리며가 이 영화 다음이었던가? 당시에는 드디어 장동건도 배우가 되었다며 다들 난리였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이 두 편 이후에 생각나는 작품이 없구나. 이제는 아빠가 되어버린 그가 빗 속에서 피흘리며 맞은 마지막장면. 확실히 남자들이 보고 "호~오~"하며 따라하고 싶어질만큼 멋지긴했다. 왜 액션영화에서 항상 주인공이 피터지며 싸울 때는 반드시 비가 오는건지를, 이 영화보고 알게 되었다는.
와니와 준하
세월이 참 빨리 흐르는구나. 장동건도 아빠가 되어버렸고, 김희선도 엄마가 되어버렸네. 언젠가 또 문득 이 영화들 떠올릴때면 다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씁쓸하다. 내 나이 먹는건 전혀 실감이 안나는데 이런 배우들이 늙어가는건 왜 이렇게 실감이 나는걸까.
장동건도 연기논란이 많았지만, 김희선은 연기논란이라고 할 것도 없이 욕만 진창 먹었더랬다. 전성기때는 찍는 드라마마다 시청률도 잘 나오고, 머리때니 곱창밴드니 엄청 팔렸었는데. '웨딩드레스'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을 때는 서울이고 부산이고 그 또래 언니들은 죄다 폭탄머리하고 다녔다는 전설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만큼 영향력이 있었음에도 정말 지지리도 발전이 없던 연기력의 김희선.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녀는 날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화장기없는 그 얼굴에, 긴 머리도 싹둑 자르고는, 천연덕스럽게 와니가 되어있었다. 완벽한 와니가. 이 영화의 내용상 비가 쏟아지고, 차츰 약해지다가 완전히 그치는 과정은 참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 부분을 여주인공이 잘 살려줘야 하는데 그걸 김희선이 연기해내는 걸 보고 "우와"싶었다. '이 여자, 정말 영악하구나, 지금껏 할 줄 알면서 안했던거야?'라는 생각이 들만큼 괜찮았다. 비를 흠뻑 맞고 들어온 여주인공이 떠난 남자의 메모를 보고 우는 저 장면도 참 좋았지만, 이후에 끙끙 앓고 일어난 그녀가 시골 이모집에서 수돗가에 앉아 슥슥 목을 닦아내는 장면도 좋더라. 도대체 왜 이 영화 이후 다시 그 옛날의 연기력으로 돌아간건가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종영한 '참 좋은 시절'보면서 '우왕, 잘한다..'하며 입벌리며 봄.
늑대의 유혹
허허허... 보기만해도 흐뭇해지는 장면. 영화 내용따위랑은 전~혀 상관없이 그저 저 미소만으로 모든걸 만족시켜주는 이 장면. 주책이야 정말;;;
이제는 의형제와 우행시로 연기력 검증 끝낸 강동원이지만, 분명히 그 두 작품이 최고의 필모그래피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잊어버릴 수가 없다. 우산속에서 살포시 웃으면서 강동원이 나오는 요 장면과 새끼고양이를 꼭 안고 울것같은 표정을 한 강동원이 있는 그 장면때문에. 내용?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가슴 벌렁거리는 그 두 장면만 자꾸만 떠오를 뿐. 그리고, 나도 비오는 날 저런 남자랑 한 우산을 쓸 수 있다면, 매일같이 이상기우로 비가 쏟아지더라도 행복하기만 하겠구나..싶을 뿐. 이렇게 영화보면서 여주인공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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