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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후카츠에리의 남자들

녹차처럼 청량하고 와사비처럼 톡 쏘는 매력을 가진 일본여배우 후카츠에리. 특유의 맑은 느낌과 친근한 이미지가 있어서 좋아하는 여배우 중 한 명이다. 최전성기는 아무래도 2000년대 초중반이었겠지만 대중적인 인기와는 별개로 데뷔 초반부터 최근까지도 괜찮은 필모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그녀의 출연작을 훑어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유독 특정배우들과 인연이 깊은 편이라는 것. 그래서 한 때 유행했던 '기무라타쿠야의 여자들'처럼 '후카츠에리의 남자들'을 찾아봤다. 3편이상 같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췄던 남자배우들.


후카츠 에리와 기무라 타쿠야


태초에 이 드라마가 있었다. 중년이 되어버린 두 사람이지만, 기무라 타쿠야와 후카츠 에리의 포텐이 제대로 터졌던 드라마. 주연배우와 작가, 감독까지 모두 톱클래스로 만들어준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 일본사람들은 소라호시라고 부르더라. 


위험한 냄새를 폴폴 풍기는 나쁜남자와 평범하면서도 가련한 여자, 그리고 그녀의 형사오빠. 막장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나는 좋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여전히 좋음. '헐'스러운 두 사람의 엔딩마저도 매번 좋음.





'추신구라'라는 시대극에서도 두 사람이 함께 출연했더라.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위의 소라호시와 비슷한 무렵 방영된 걸로 보인다. 상대역으로 나온건지는 알 수 없지만.





중년이 되버린 두 사람이 10여년만에 다시 만난 '체인지'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했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때와 전혀 다른 캐릭터설정이라 더 좋았다. 딱히 러브라인을 내세우는 내용은 아니었으나 기무라 타쿠야와 후카츠 에리의 투샷을 볼 때마다 괜히 설레더라는. 


특히 언제나 평범하고, 친근하고, 털털한 여성상만 연기하던 후카츠 에리의 똑부러지는 커리어우먼의 모습이 신선했다. 그만큼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다는 거겠지.


위 세 편의 드라마 외에도 90년대 드라마 중에도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 드라마가 분명히 있었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엄~청 옛날 드라마라서 기무라 타쿠야가 단독 주연으로 나오지도 않고, 후카츠 에리의 비중도 정말 작은 드라마였는데. 그 시절의 드라마는 국내웹에서 찾기가 힘드네.




후카츠 에리와 츠마부키 사토시


4년 가까이 내 일상의 bgm이었던 드라마다. 왜 그랬는지 집에 있을 때면 항상 이 드라마를 틀어놨었다. 덕분에 어느 타이밍에 어떤 대사가 나오는 지도 외워버렸고, 기초 일본어를 마스터했지. 한자는 물론이고 히라가나와 카타카나도 잘 모르지만 기본회화는 '슬로우댄스' 덕분에 배울 수 있었다.


교생실습을 나갔던 여대생과 감독을 꿈꾸던 남고생은 훗날 운전교습소에서 만난다. 아, 카페에서 먼저 만나는구나. 일과 결혼사이에서 삐그덕대는 30대 여성의 전형을 후카츠 에리가, 대학을 졸업하고 꿈이나 전공과는 전혀 관계없는 월급쟁이가 된 20대 중후반의 전형을 츠마부키 사토시가 연기한다. 과거의 인연, 불쾌한 재회, 우연한 만남의 반복, 이상과 현실의 괴리 등등 반듯하게 잘 짜여지는 드라마이고 특히 두 사람의 대화 중에 명대사가 많다. 


중요하고 묵직한 메세지를, 가볍고 산뜻하게 남겨주는 예쁜 드라마. 





몇 년째 일본의 톱을 달리고 있는 우익 하루카가 '기대되는 신인 여배우'였던 시절의 영화 '매직아워'

마피아?깡패?조폭? 아무튼 어둠의 뒷세계를 주무르는 보스. 그런 보스의 여자가 후카츠 에리, 그녀를 탐하는 쫄따구(..?)가 츠마부키 사토시. 위험한 관계를 가지는 두 사람이 아주 상스럽고 코믹하게 그려진다. 


워낙 '슬로우댄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캐스팅만 보고도 완전 기대했다. 그리고 기존의 이미지와 아주아주 다른 모습에 더 즐겁게 봤던 영화. 새빨간 립스틱에 실크 슬립을 입은 후카츠 에리는 더더욱 예뻤고, 1:9 가르마로 촐싹거리는 츠마부키 사토시는 전에 없이 귀엽더라.





두둥! 후카츠 에리에게 여우주연상을, 츠마부키 사토시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그 영화 '악인'이다. 일본영화이니 자국 영화제에서의 수상은 그렇다쳐도 후카츠 에리는 몬트리올 영화제에서도 이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팬심이란 이런건지 괜히 내가 더 기쁘고 좋더라. 이 영화가 벌써 5년전 작품이라니..


언제나 오렌지마냥 상큼하고 밝은 이미지였던 두 배우가 작정하고 연기변신을 시도했다. 어둡고 음침한, 외롭고 불쌍한 모습의 두 사람이 세상의 바닥까지 떨어져 좌절하고 절망하는 모습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분명 아주 찝찝하고 불쾌한 영화이거늘, 입맛이 싹 가시는 내용과 엔딩이거늘. 잘 안다고 생각했던 두 배우의 고군분투하는 모습과 이런 사람들의 이러한 이야기를 영화라는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감독의 능력에 감탄했다. 


이 때 부산영화제에 가지 못한 것이 내 평생의 한이 될 것이오ㅠ 


참, 후카츠 에리가 아주 매력적인 숏커트 비주얼을 보여줬던 '카바치타레'에도 잠깐이지만 츠마부키 사토시가 나온다. 얼마전에 그 드라마를 다시 보다가 발견하고는 '어머머'했다는.




후카츠 에리와 오다 유지


각각 다른 작품에서 다른 캐릭터롲 재회했던 기무라 타쿠야나 츠마부키 사토시와는 달리 단 한 편의 작품에서 만났으나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있다. 97년 드라마로 시작해서 2012년까지 4편의 영화로 제작되어 일본 형사물의 새 지평을 열었던 '춤추는 대수사선'의 오다 유지. 


처음 일본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을 때, 일드를 좀 본다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 드라마를 강추하였으나 포스터를 봐도 줄거리를 들어도 딱히 끌리지 않아 무시했다. 달리 보고 싶은 드라마들이 넘쳐났으니까. 그렇게 몇 년을 잊고 지내다가 뒤늦게 후카츠 에리가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1편을 보기 시작했고, 하룻밤만에 마지막회까지 본 후 홀린듯 극장판을 뒤졌다. 


드라마의 인기에 빌어서 영화를 한 편도 아니고 3,4까지 우려먹으면서 원작을 망쳐버리는 경우를 자주 보는데 '춤추는 대수사선'과 '트릭'만큼은 끝나지 않고 계속 시리즈로 만들어주기를 바라기도 했었다.  


워낙 남자주인공의 비중이 압도적이라 후카츠 에리의 비중이 적은 건 슬프지만, 그럼에도 다음 편을 찾아보게 만들 정도의 매력이 있다. 4번째 영화를 마지막으로 대단원을 내렸는데, 그 4번째 영화와 97년에 방송되었던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세월이 참 많이 흘렀구나' 싶은 동시에 '오다 유지도, 후카츠 에리도 참 안 늙는구나. 한결같네' 하는 기분이 된다. 




여기에 언급한 후카츠 에리의 모든 작품들은 물론이고 '여자아이 이야기'처럼 거의 단독으로 나오는 작품까지 그녀의 출연작은 모~두 다 좋아한다. 그럼에도 옛날 옛적에 봤던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이 너무나도 재밌었고 충격적이라고 표현할만큼 푹 빠졌었기에, 기무라 타쿠야와 함께 있는 모습이 가장 애틋하고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