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난다. 조금씩 가까워져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영화가 비슷한데, 그 두사람의 결말을 어디까지 보여주느냐에 따라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나아가 장르까지 바뀌는 건지도 모른다. “알콩달콩 연인이 되었습니다”라거나 “많은 이들의 축복속에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습니다”로 영화를 끝내는 게 대부분의 로코. 재밌는 건, 기억에 남는 멜로영화는 하나같이 두 사람이 만나서 감정이 깊어지는 부분까지만 보여주고 결말에서는 두 사람이 헤어진다는 것. 이후 다시 만날 수 있을 지 없을 지 절대 알려주지 않는.. 내 기억의 정통멜로는 죄다 그런 불친절한 영화였다. 이 영화, ‘만추’처럼.
개봉 당시 워낙 현빈이 ‘시크릿가든’으로 인기를 구사할 때라 그의 출연이 더 화제가 되었지만, 이 영화는 여배우의 연기력이 정말 필수적이라 할만큼 여주인공의 캐릭터가 매력적이다.
7년전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복역중인 여자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단 3일간의 출소를 나오게 된다. 7년간 모든 것과 차단되어 살아온 여자의 과거, 사건의 진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심스레 보여주는 그녀의 감정변화.
이 영화의 개봉무렵, 현빈이 군대가기 전 참 많은 시도를 했구나 새삼 느낀다. 까칠한 재벌남부터 흔히 초식남이라 불리는 그 정적인 남자, 그리고 원정제비까지. 어찌보면 자신감넘치는 모습이 ‘시크릿가든’에서의 캐릭터와 겹치는 것도 같았는데 “하오”하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중국어를 읊조리는 여자의 말을 묵묵히 듣고 앉아있는 모습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에서의 그가 떠오른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참으로 찌질한 캐릭터인데, 그래서 몇 몇 장면들이 멋졌다고 기억에 남게되는 아이러니.
나쁜 투더 놈. 으! 원래 이야기에 잘 빠져드는 편이지만, 이런 캐릭터를 보면 더더욱 몰입되서 욕하게 된다. 정말이지 나쁜놈.
쓰면서 생각해보니 두 남자 캐릭터설정이 참 재밌다. 언뜻보면 가볍고 나빠보이는 사람이 알고보니 진국, 수트차려입고 처자식과 문상 온 가족같은 옛남자는 나.쁜.놈. 이게 영화라서 참 다행이다.
저 장면에서 남주가 저 나쁜놈을 흠씬 두들겨패주길 바랬는데…
폐허가 되버린 놀이공원. 그 스산하고 어두운 곳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지던 순간까지는 내 마음 속에 희망이 있었다. 부디, 해피엔딩을 보여주길. 희망적으로 열린 결말을 보여주길.
스토리의 절정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부분. “하오” 멋있었다, 정말.
한동안 내 노트북의 배경화면을 맡았던 이 장면에서부터 ‘젠장’소리가 절로 나오더라. 그러면서도 ‘아니야, 안돼, 설마, 설마..’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 이럴 때마다 감독을 욕하게 된다. 만나보지도 못한 내 마음을 꿰뚫어보고는 날 가지고 노는 것같아서. 그만큼, 그 사람들이 능력있다는 소리겠지. 영화는 좋은데, 감독은 밉다.
오랜만에 복장터지는 엔딩. 열린 결말이라고 만든건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내 속은 썩어 문드러졌던 엔딩. 보여달라고! 관객이 원하는 걸 알면 감추지 말고 보여달라고!
하지만 나도 알고는 있다. 내가 답답함이라고 표현하는 그 여운이 엔딩에 있어야 그 영화가 더 오랫동안 기억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여전히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같은 ‘만추’의 엔딩.
한동안 끙끙 앓다가 결국엔…
시나리오집까지 사버리며 원한서린 팬이 되버렸다. 감독이 마지막으로 정리한 시놉과 영화장면이 섞여 있어서 꽤 색다른 느낌으로 봤다.
소설을 원작으로 찍은 영화를 먼저 봤다면 그 원작소설은 굳이 찾아 읽지 않는 편이다. 글을 읽을 수록 영화의 장면들만 떠올라서 정신없길래, 언젠가부터는 하나만 보려고 애쓴다. 소설을 읽었으면 영화는 안 보고, 영화를 봤으면 소설은 안 읽고. 근데 시놉은 또 달랐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바뀔 때마다 촬영현장에 있었을 스텝들과 컷소리, 지문을 읽고 연기했을 배우의 표정. 그런 것들이 떠올라서 왠지 내가 본 영화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인 또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랄까.
1966년 이만희감독이 만든 ‘만추’는 1981년 김수용감독이 처음 리메이크했고 2011년에 김태용감독이 또 한 번 리메이크한 게 이 영화라고. 찾아볼 수..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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