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그 남자의 레시피

휘둥그런 달이 둥둥 뜬 달밤에 따땃한 이불속에 누워 드라마며 영화를 보고있노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한계의 순간이 온다. 화면속 그들이 뭔가를 엄~청 맛있게 먹는 장면이 시작됨과 동시에 굶주린 배는 울고, 울고, 또 우는 바로 그 순간. 어쩌리, 먹어야지.

정말 굳은 마음먹고 성공적인 다이어트를 하려면 영화도 멀리해야 한다며 울적해하면서도 한 손에 수저를 쥐고 우적우적 급히 주문한-또는 만든- 음식을 입에 투입해주며 다시금 스토리에 집중하려고 하는 그 때, 또 다른 한계의 순간이 온다. 젠장, 저 여자는 전생에 뭔 큰 일을 했길래 저리도 멋진 남자들이 저리도 맛난 음식들을 해바친단말이냐! 하루하루 나이는 먹어가는데 왜 가면 갈수록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모호해지는건지...

 

밤10시에 하는 드라마가 하는 짓중 가장 미운짓은 주인공들이 맛있게 라면먹는 장면을 무슨 CF마냥 실감나게 방영할 때다. 제아무리 한우고기가 맛있고 캐비어가 값비싸다고해도, 그 시간만큼은 몇백원짜리 라면을 이겨내지못한다. 대한민국사람중에 드라마나 영화보다가 본능적으로 라면봉지 뜯어본 경험이 없는사람이 몇이나될까?

달밤에 라면은 명품백보다 매력적이다 in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여주인공도 드라마를 보고 있었던건지 냄비에 물을 끓이다가 밤에 뭔 라면이라며 면박을 주는 남자의 문자에 의욕상실하고 잠이 들지만, 그 순간부터 우리의 작업남은 바빠진다.

 

한달짜리 배낭여행갈때나 쓸법한 배낭에 버너며 냄비며 생수에 라면에 젓가락까지 준비해서 야심한 밤에 칼바람부는 서울을 달리기 시작한다. 그것도 자전거를 타고말이지. 그리고는 서프라이즈~답게 사전에 여자친구집 앞에서 보글보글 라면이 끓을 때쯤 그녀를 불러내는데...

 

 어느새 속물이 되어버린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자연스레 라면을 끓이기도 했지만, 속으로 요렇게 생각했다. '처음엔 뭘 못해주냐. 니가 일년넘게 그 여자랑 사귀고 나서도 그럴수 있을 것같아?'라는 참 서글프고 비참한 생각. 하지만 뭐, 냉정을 되찾고 생각해봐도 그건 사실인 것같다. 스토리상 아직 저 두명이 러브러브모드가 아닐 때였으니까. 다~ 작업일뿐인거다!

 

 

우울해보이는 그녀에게 커피소주를! in 6년째연애중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에서 라면끓여주는 작업은 그래도 풋풋~한 것이 '청춘이로구나' 하는 마음에 옛생각도 나고 좋았는데, 6년째연애중의 이 남자는 왠지 선수필이 충만해보인다. 저 표정을 보라! '넘어왔구나!'하는 표정이잖아?

이렇게 말하고는 있으나, 이 영화 보고 나오자마자 저 커피소주를 바로 시도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인 나. 요즘도 커피소주를 즐겨마시는 나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뜨거운 아메리카노랑 섞다가 그 미적지근한 온도에 실망했고, 이후 아이스커피와 섞다가 그 밍숭맹숭함에 실망해서 결국은 다 식어빠진 에스프레소랑 섞거나 아예 소주병에 블랙믹스 3봉지를 투입해주고 마구 흔들어마신다는. 아마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 커피향에 안 넘어갈 수가 없지않을까싶다. 나를 포함한 주변 지인들중에서도 싫다는 사람은 아직 없었음.

 

 

럭셔리욕조에서는 럭셔리한 술상을! in 글루미선데이

 

 그 유명한 명작 글루미선데이의 여주인공은 내가봐도 현실 속의 인물이 아닌것처럼 예뻐서.. 부럽다는 말도 함부로 못하겠다. 스토리에 딱 맞는 최고의 캐스팅이 아닐까? 그렇다보니, 전혀 다른 타입의 두 남자가 서로의 존재를 납득하면서 사랑해버리는 것까지도 공감하며 봤었지. 그 두 명의 남자중 수완좋은 레스토랑 사장인 자보가 그녀에게 갖다바치는 저,저,저! 술상은 정말 호화의 극치다.

 

두 사람 모두 올 누드라 꽤 야한데도 불구, 정작 눈이가는건 뽀글뽀글 올라오는 저 샴페인잔. 별것없어보이는 안주지만 자세히보면 기본스틱에다가 이런 맛 저런 맛 종류별 소스들이 정성스럽게 준비되어있다. 저렇게 예쁜 욕조에서, 저렇게 탐나는 술상을 받아보려면... 도대체 얼마나 예쁜 얼굴로 태어나야하는 것이며, 도대체 얼마나 센스있는 남자를 만나야하는 것일까.

 

 

 

말은 안통해도 맛은 통한다 in 오이시맨

 

 계란밥을 아시나요? 새하얀 쌀밥에 날계란을 톡 깨어넣고는 간장과 참기름을 넣어 슥삭슥삭 비벼주면 완성되는 초간단,하지만 초절정 맛있는 계란밥.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는 계란밥. 말도 잘 통하지않는 저 두 사람이, 이제 겨우 조금씩 서로를 이해할 때쯤에 딱! 이민기가 떠나게 되는데 그 전날밤 둘이서 저 계란밥을 먹는다.

 

여주인공이 밥을 푸고, 계란과 간장을 가지런히 놓고 이민기가 삭삭 비벼서 건네주던 그 순간 이케와키 치즈루의 웃는 얼굴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뭐랄까, 너도 이 요리를 아는구나! 너도 이걸 만들줄 아는구나!라는 반가움과 우리가 조금 가까워졌구나하는 친근함이 보인것같다. 그런데말이지, 날계란에 섞여 흐물거리는 밥을 젓가락으로 먹으려면 꽤 힘들것같지? 또 다시 깨닫는 내 손위 숟가락의 감사함. :)

 

 

 

 

그남자의 예쁜짓 in 와니와준하

아까는 라면끓여주는 것도 다 한때다, 작업일뿐이다,라고 외쳐댔지만 그저 순수하게 부러워질때도 있다. 와니와준하의 이 장면처럼. 남자 혼자 마트에서 저런 카트끌고 다니는 것도 창피할 수있을 것같은데, 어설픈 솜씨로 레시피를 열심히 봐가면서 만든 해물탕.크~ 좋구나. 거기에 해물탕+화이트와인의 조합도 신선해서 꽤 오랜시간동안 궁금해했었다. 저 조합은 작가가 생각한걸까 감독이 생각한걸까 아님 나만 모르고 다들 아는걸까,하는 의문은 아직도 남아있다는...

요리 잘하는 남자가 멋있다고들 하던데 나는 알렉스처럼 멋드러지게 휙휙 척척 만들어내는 사람보다는, 이렇게 특별한 날에만, 못하는 솜씨로 끙끙거리며 요리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더 끌리는 것같다. 뭐 능숙하게든 어설프게든 오밤중에 영화보면서 쓸쓸함과 배고픔에 허덕이지않게만 해준다면 좋겠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