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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계를 평정한 재일교포감독들의 영화

언제부터였을까? 영화 ‘GO’를 본 후였던 것 같기도, 그 이전에 등단하자마자 자살해버렸다는 재일교포 소녀작가의 씁쓸했던 소설을 읽은 후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한창 사춘기라 나와 가족, 친구의 관계며 어린시절의 기억,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갖은 공상으로 속앓이를 하던 나에게 재일교포들의 이야기는 뒷통수를 후려치는 느낌이었다.


욘사마의 ‘겨울연가’로 문이 열리고 근짱의 ‘미남이시네요’라던가 아이돌가수들까지 우루루 일본으로 쏟아져 나갔다. 이후로 지금은 아마도 일본 내에서 재일교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조금 덜 차가워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네 명의 재일교포 감독들이 일본영화계 내에서 만들고 개봉시켜낸 영화들을 보면 한국인이면서도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일본인이면서도 조선인으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의 고민이 담겨있다.


 



첫번째 재일교포출신 일본영화감독 최양일


내가 알기로는 일본영화계에 진출한 첫 재일교포, 아니 재일한국인. 두 단어가 어떻게 다른 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감독데뷔연도가 1983년이니 30년전인데.. 당시로서는 정말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감독데뷔가 아니였을런지.


10년이상 유명 감독들의 조수를 거쳐 83년 데뷔작 ’10층의 모기’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가 일본국내영화제에서도, 해외 영화제에서도 수상을 거듭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딱 10년뒤 93년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로 또 한 번 영화제에서 53개의 상을 수상하고 일본영화 흥행 1위를 기록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대표작도, 영화제수상작도 많이 보유한 거장.


 


최양일 감독의 대표작


1993년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최양일감독도 그렇고, 아래의 다른 감독들도 대부분 첫 작품에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 갈등이 가장 잘 느껴진다. 이후에는 다소 희석되기도 하지만.


일본에서 택시기사를 하고 있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코미디. 흔히들 ‘밑바닥인생’이라고 부르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당시 일본영화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감독의 이름을 드높여준 영화.


 


 


1998년 개 달리다


형사와 정보원, 그리고 창녀. 전작에서 이어지는 분위기의, 인간냄새 폴폴 풍기는 코미디.


 


 


2004년 퀼


혹자는 최양일감독을 ‘디즈니적 세계관’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만큼 동물에 대한 관심도 많고 관련 작품도 많다. 그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퀼’은 맹인안내견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2004년 피와 뼈


화려한 미래를 꿈꾸며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 남자를 기타노 타케시가 연기한다. 원작은 양석일의 동명소설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간 유럽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많은 헐리웃영화같은 줄거리이지만 특유의 인간미가 묵직하게 담겨있다.


 


 


두번째 재일교포출신 일본영화감독 구수연


광고감독출신, 감독이자 소설가. 이력도 행보도 독특한 구수연. 26세에 CM디렉터로 데뷔하며 승승장구하다 2002년에 ‘우연히도 최악의 소년’이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그리고 그걸 본인이 영화화. ‘불고기’라는 작품도 동생의 소설을 본인이 감독으로 나서 영화로 만들었다. GOO라는 채널도 가지고 있었는데 아직도 운영하는 지는 모르겠네.


사진은.. 보자마자 “이거다!”싶어서. 시상식이라던가 다른 사진들보면 이 분 꽤나 멋쟁이인데, 왜인지 이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더라고.


 


구수연감독의 작품


2003년 우연히도 최악의 소년


역시나, 일본에 살고있는 한국인에 관한 이야기. 가족들과는 만나지 않고, 학교도 가지 않고, 자살한 누나의 시체를 앞에 두고도 실없이 웃을 뿐인 재일한국인과 도벽이 있는 소녀가 만나 사건을 계획한다. 죽은 누나에게 한 번이라도 한국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체를 태우고 밀항하기.


감독의 가족관계와 학창시절까지는 알 수 없으나, 왠지 주인공과 감독은 닮아 보인다. 소설을 쓰면서, 그걸 영화로 만들면서 조금은 털어냈기를.


 


 


2006년 불고기


일본만화에 흔히 등장하는 요리대결, 대형 레스토랑과 작은 동네식당이 대결하고 형과 동생이 부딪힌다.그리고 한국의 음식인 깻잎, 된장찌개, 일본식 불고기라는 야키니꾸가 주 소재로 등장하는, 어찌보면 전형적인 일본요리만화의 극장판.


 


 


2011년 하드 로맨티커


‘우연히도 최악의 소년’의 연장선에 있는 영화. 학교를 자퇴하고 건달처럼 살고 있는 한국인2세의 복수극..쯤 되려나? 보지 못했다. 하지만 시놉 몇 줄만으로도 이제는 확신한다. 구수연감독이 만들고 있는 영화는 모두 자신의 경험과 주변 재일한국인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고.


 


 


 


세번째 재일교포출신 일본영화감독 이상일


국내에 가장 많이 알려진 일본감독이자 재일교포-재일한국인이라고 하는데 두 단어가 어떻게 다른 건지 누군가 알려주세요-감독, 이상일. 이 감독의 작품이 하나같이 내 취향이라 한창 일본영화에 빠져들었을 무렵, 감독이름에 떡하니 한국이름이 적혀있는 걸보고, 재일교포라는 걸 알고 더 감동받아서 열심히 찾아봤더랬다.


일본영화학교에 재학하고 졸업작품인 ‘푸를 청’이라는 작품이 피아 영화제에서 4개상을 수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받았다. 이후 ’69 식스티나인’, ‘훌라 걸스’, ‘스크랩 헤븐’ 그리고 ‘악인’으로 명실상부 일본영화계의 명감독으로 인정받음.


 


이상일감독의 주요작품


1999년 푸를 청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 청년이 주인공. 그의 여동생도, 어린 시절 친구도 모두 일본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보지는 못했는데 왠지 ‘GO’가 생각난다.


 


 


2004년 69식스티나인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당시의 시대상과 학창시절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는 청춘영화. 이 영화에서의 인연으로 츠마부키 사토시와 이상일감독은 후에 ‘악인’이라는 명작을 만들어낸다.


 


 


2005년 스크랩헤븐


감독은 이상일, 주연은 오다기리 죠와 카세 료. 일본영화팬이라면 보고싶어질만한 라인업. ’69 식스티나인’이 학창시절을 그린 청춘영화라면, 이 영화는 현실에 불만이 가득한 20대의 청춘영화 또는 일탈영화. 초반에는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으나 끝으로 갈수록 흥미로워지고 마지막은 개운하다.


 


 


2006년 훌라걸스


일본의 산골 탄광촌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마을의 탄광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와이언 마을의 상징인 훌라걸스가 되려하는 소녀들의 이야기.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이상일감독에게 감독상을, 아오이 유우에게 여우조연상을 안겨줬다.


 


 


2010년 악인


당시 일본의 극장과 영화제를 휩쓸어버렸다고 회자되는 ‘악인’ 츠마부키 사토시의 연기력은 이전에도 호의적이었지만, 이 영화로 ‘연기파배우’로 각인된다. 시시한 일상, 시궁창같은 매일을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의 처량한 멜로가 인상적인 영화. 보다보면.. 억울해진다.


조연이자 악역으로 출연했던 오카다 마사키와 미츠시마 히카리도 이후 드라마, 영화 할 것없이 종횡무진하며 활동하는 중.


 


 


2013년 용서받지 못한 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다. 개봉했는 지는 모르겠으나 와타나베 켄, 사토 코이치 등 쟁쟁한 배우들이 잔뜩 출연함


 


 


 


마지막 재일교포출신 일본영화감독 양영희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교포 2세다. 도쿄에서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 극단배우, 라디오진행자로 활약하다 뉴욕 뉴스쿨대학원에서 미디어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95년부터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를 찍었고 TV에 방영되기도 했다. ‘디어 평양’으로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수상했고 이후 ‘굿바이 평양’ 역시 좋은 평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2012년 영화 ‘가족의 나라’로 또 한 번 그 이름을 떨쳤다.


 


양영희감독의 주요작품


2006년 디어 평양


유난히도 재일교포가 많다는 오사카에서 태어나 자란 감독 본인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에게 ‘조국’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보여준 다큐멘터리


 


 


2009년 굿바이,평양


어릴 적 헤어져 북한에서 살고 있는 감독의 오빠와 조카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재일교포의 현실을 확연히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2012년 가족의 나라


위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 영화를 보길 권한다. 비록 창작물이지만, 감독의 가정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만약 북한에 있는 오빠가 일본으로 잠시나마 돌아온다면..’이라는 강한 바램과 그에 동반되는 고민을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영화. 대부분의 영화사이트에서 평점 9점대를 유지중인 명작.


드라마, 음악, 영화를 거쳐 이제는 한국뮤지컬이 한류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최근 10여년동안 많이 나아졌으리라 생각하지만, 아직도 혐한을 외치는 일본인들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듣기로는 한류열풍이 부는 것과 재일교포에 대한 편견은 별개라고, 여전히 차디찬 시선을 받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지금도 그러한 현실이라면, 이 네 명의 감독들이 어렸을 무렵, 학교에 다녔을 무렵에는 오죽 했을까. 안타깝고 왠지 미안하면서도 그 수모와 고통을 영화라는 형태로 멋지게 풀어냈다는 게 멋지다. 존경스럽다. 그래서 보통의 한국감독 또는 일본감독의 영화보다 이들의 영화를 조금 더 챙겨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