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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중경삼림

여자인 내가 봤을 때, 남자사람인 내 친구는 괜찮은 남자다. 첫 눈에 호감이 갈만큼 잘생겼고, 애인이 생기면 다정다감한 지수가 온몸을 닭살로 뒤덮을 정도. 바람을 핀 적도, 애인보다 친구를 중요시한 적도 없는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지난 12년간 그 친구는 끊임없이 차이고 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 면역이 생길법도 하건만, 언제나 연애가 끝날때면 울고불고 굶고, 취하고 또 울며 청승맞은 멜로영화를 찍으신다. 그런 그를 보면 나는 언제나 이 영화를 떠올리곤 한다.





왕가위의 머리속에 경찰이라는 사람들은 어떤 이미지였던걸까? 이 영화만 봐서는, 그들에게 지나친 친근함을 가졌던게 분명하다.


시민의 지팡이 경찰, 무시무시한 문신 아저씨들을 용감하게 체포하는 정의의 용사 경찰, 을 이리도 인간적으로 그려내다니. 어쨌든 두 명의 실연당한 경찰아저씨들은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신선했던 것같다. 왕가위의 영화를 보고 다들 미쟝센이 어쩌니 저쩌니 하던데, 그건 둘째치고 캐릭터가 신선하잖아. 밖에서는 경찰제복입고, 수갑 짤랑거리면서 천하무적인 마냥 돌아다니는 저 분들이, 사실은 여자에게 차여서는 날짜지난 통조림먹다가 구토하고 비누며 행주에 대고 설교를 늘어놓는다니! 만약 다양한 방법으로 실연을 겪어내고 있는 저 남자들이 경찰 아닌 다른 직업이었다면, 이 영화 참 별 볼일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독특한 미쟝센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영화에 몰입되지 않게끔 안간힘을 쓴 후 이 영화를 다시 보게되면… 영화 속에 제대로 된 정신을 가지고 계신 분이 없다. 아, 그래도 그 샐러드가게 주인아저씨는 왠지 주변 어디 상점가에 있을 법하긴하다. 손님들 일에 살짝살짝 간섭해가며, 어떻게든 뭔가 하나 더 팔아보려 안간힘을 쓰시는. 그래도 밉지않은 아저씨. 그 아저씨를 빼고는 죄다, 특히 네 명의 주인공은 몽땅, 이상하다. 아마도 그래서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걸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언제 비가 올지, 언제 해가 뜰지 몰라서 항상 레인코트와 선글라스에 몸을 숨기고 다닐만큼 소심하면서 총으로 빵빵!쏘는 여자. 감히 경찰아저씨 집에 무단침입해서 우렁각시 흉내를 내는 간 큰 여자. 남자주인공들은 귀여울만큼 찌질한데 반해서 여자주인공들은 섬뜩할만큼 매력적이다. 물론, 영화니까!


임청하도 참 섹시하고 신비로운 캐릭터였지만, 난 왕비의 캐릭터에 제대로 빠졌었다. What a Difference a Day Made와 California Dreaming은 3년이 넘도록 내 컬러링과 벨소리를 담당했고, 좋아하는 여배우 1순위는 아직도 변함없이 왕비, 그녀다. 도대체 왜?라고 몇 번이고 생각해봤지만, 모르겠다. 혹시 왕가위가 실제로 사랑했던 캐릭터가 그녀의 역할이라 감독이 조금 더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그렸던건 아닐까? 아님..말고.


 


 



찾아보면 재미있고 신선한 옴니버스 영화들이야 널렸지만, 중경삼림만큼 신선하고 유쾌하지는 않더라. 이런 류의 구성을 처음 본 게 이 영화였던 탓일까. 다른 영화들에서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용을 쓴 흔적이 자꾸만 보이는데, 여기에서는 저 샐러드가게와 주인아저씨도, 통조림도, 여주인공들이 스치는 장면도 유쾌하고 신선하다. 몇 번을 다시봐도 깜짝 놀라고 큭큭하며 웃게된다. 이런게, 감독의 능력을 보여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덧붙이자면,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는 금성무가 귀여워서 따라해보려다가 3캔 먹고 입천장 까끌거려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는. 역시, 영화든 소설이든 픽션은 함부로 따라할 것이 못된다.


 


 



유명한 감독이 유명한 배우들과 만든 유명한 영화. 벌써 이 영화가 태어난지 20여년이 가까워오지만 아직도 중경삼림이라는 제목만 들어도 모두가 알만큼 유명한 영화.


그래서 명장면도 많고, 명대사도 많고, OST도 유명하고. 처음에는 나도 금성무가 임청하 구두 벗겨주는 장면이나, 통조림 유통기한 따지는 이야기, 양조위의 ‘선택권’에 대한 명대사, 왕비가 몽유병 걸렸을 때의 환상적인 그 화면 등등 예뻐죽겠는,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장면과 대사들이 많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를 눈으로 꿀꺽, 삼켰는데 머릿속과 가슴속에서 도저히 소화가 안되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그만큼 중독되어 있었지..


하지만 많고, 많은 날들이 지난 지금은 저 장면. 첫번째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카메라가 잡아주는 저 1994년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통조림이 가장 인상적이다. …왜일까?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사랑은 깔끔하게 내다버리고 새로운 어딘가로의 비행기티켓을 끊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매일같이 실연당하는 내친구의 그 지긋지긋한 이별놀이도 끝나지 않을까? 빳빳한 비행기티켓을 들고는 임청하처럼 치명적으로 섹시한, 왕비처럼 섬뜩하게 사랑스러운, 그런 여자친구를 만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밤이면 밤마다 술마시자는 그 전화를 멈춰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금성무처럼 잘생기고 외국어도 잘하고 섬세한, 양조위처럼 시적이고 다리마사지도 잘하고 매력적으로 웃는, 그런 남자를 만날 수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