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소설을 읽을 때도, 드라마를 시청할 때도, 영화를 관람할 때에도 무조건, 해피엔딩이 좋고 현실보다는 살짝 핑크빛이 감돌길 바란다. 그 맛에 문화생활을 즐기는게 아니겠는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상영관에서 나오며 콧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는, 또 다시 내일을 기분좋게 시작할 수 있는 그런 힘을 주는게 나의 문학이고 나의 영화이며 나의 문화관.
그런데 이 영화, '사와코, 결심하다'를 보고서는 뒷통수를 훅!하고 만화에 나오는 100톤망치에 두들겨 맞은 것같았다. 한마디로, 충격이었지. 이토록 지나치리만큼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영화가 있어서, 결말에 다다를 수록 점점 여주인공에게 몰입되면서 함께 '으쌰!'할 수 있는 영화가 있어서 진정 행복하다.
시작부터가 남다른 이 영화. 사와코가 장청소를 하며 의사와 시덥잖은 대화를 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저걸 뭐라고 하더라.. 관장? 뭐 그런거겠지.
처음에는 '초반분위기를 보아하니 이 영화는 코믹인건가'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저 행위가 어쩌면 사와코에게 유일한 일탈이랄까, 스트레스의 분출구랄까, 그런 느낌이 든다.
그 정도로 사와코는 답답하고 시시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여자였다.
이 회사 저 회사를 옮기며 다다른 다섯번째 직장. 일본에서 흔히 OL이라고 칭하는 일반사무직원.
차 심부름을 비롯한 온갖 시덥잖은 일이 그녀의 주 업무다. 장난감회사인 주제에 - 좀 밝고 창의적인 분위기여야 하지않냐는 말이지 - 상사들은 거만하고 오만하고 건방지며 동료여직원들은 시장아주머니들도 하지않으실 듯한 참견만 반복한다.
그리고 그 지옥같은 회사에서 만난 남자친구는.. 정말이지 답이 없다.
'에코'를 입에 달고사는 애딸린 이혼남. 성격은 완전 파.탄.자!! 지금껏 보아온 영화속 최악의 남자캐릭터 1순위로 당당히 올라서신 이 분.
하지만 결국 아버지가 있는 고향으로 사와코가 돌아가게 된 간접적인 계기는 마련해주었으니.. 마지막에는 참회하였으니.. 봐줘야.... 아니!아니!아니다!! 정말 이 캐릭터는 구제불가능;;
아무튼 도쿄에서의 사와코는 바사삭바사삭 소리가 날 만큼 무미건조한, 그녀의 표현대로 어중간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사와코가 그런 그녀의 주변환경을, 캐릭터를, 삶을 변화시키는 '결심'을 하게 되면서 영화는 절정으로 돌입한다.
몇 가지의 이유로 사와코와 구제불능 남친, 그리고 그의 딸. 이 세명은 사와코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지금은 쓰러져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아버지와 그의 바지락공장이 있는 그 곳. 어릴적 사귀던 동네 양아치님과 함께 뛰쳐나온 그 곳. 아버지와 어느 여사님의 애정씬을 목격해버렸던 바로 그 곳으로.
그리고 역시나 이 재수 지지리도 없는 캐릭터 사와코는 공장아주머니들에게도 완전 무시를 받는다.
설상가상으로 본인은 애딸린 이혼남인 주제에 사와코가 옛남친과 동네를 함께 떠났다는 이야기에 발끈하며 남자는 집을 나간다. 그것도 사와코의 고등학교동창과 함께. 게다가 자기 딸아이는 남겨두고. 아.. 정말 이 남자캐릭터 완벽하게 짜증!난다.. 괜히 또 울컥;;
머피의법칙이 인생 전반에 걸쳐져있는 듯한 여자의 이야기를 내가 왜 굳이 시간들여가며 봐야하나싶어 끌까말까 고민하던중, '오옷, 이제 변할꺼구나!'싶었던 시작은 바로 이 장면.
사와코의 동네친구와 눈맞아 집나가 버린 미친X의 딸아이와 저 욕조에 앉아있었다. 꽤 묵묵히. 꽤 오랫동안. 그리고 나직이 한마디. "먼저 나가있어. 난, 여기서 좀 울고 나갈테니까"
영화의 절반정도가 지나고나서야 드디어 여자주인공의 감정을 표현하는 대사가 등장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녀는 점점 더 변하기 시작한다. 사와코의 결심은 아마도 이 욕조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내내 공장에서 왕따를 당하던 사와코는 드디어 폭발하여 이성을 잃은듯이 아침댓바람부터 저 아주머니들 앞에서 횡설수설하며 웅변을 한다. 대충 요약하자면,
"어차피 난 어중간한, 中中下의 여자예요. 그래서 어쩌라구요!!!!!!!!!!"
정말이지 느낌표를 최소한 열 개는 붙여줘야 할 듯한 분위기였던 사와코대폭발. 이 폭발을 계기로 무시무시했던 흰 작업복의 사모님들, 사와코랑 친해지기 시작하시는거다.
그렇게 사와코의 결심과 함께 주변사람들도 변해가고, 바지락공장도 승승장구하기 시작하지만.
병환이었던 아버지는 결국 그녀를 떠난다.
이건 어쩌면 지나치게 냉정해서 잔인한 해석일수도 있는데.. 한 사람이 성장하게 되는 계기중에 가장 효과적인건 아마도 부모를 잃는 사건이 아닐까? 이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마흔이 되어도 일흔이 되어도 마냥 철없이 살아가고 싶은 나이지만, 언젠가 엄마를, 아빠를 떠나보내고 나면 별 도리없이 어른이 되어버리는게 아닐까,하는 슬픈생각.
아버지는 떠났지만 그래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사와코는 아버지와 화해를 했고, 그토록 미움받았던 바지락공장의 아주머니들은 모두가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도망가버린 남자의 딸아이와는 코드가 통하기 시작했고, 돌아오지 않는게 더 나았을지도 모를 그 남자도 일단은 돌아와서 용서를 빌었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해피엔딩인 것이다.
만약 '사와코,결심하다'라는 영화의 줄거리만 간단히 적힌 시놉이나 영화정보를 먼저 봐버렸다면, 이 영화 안봤을 것같다. 왠지, 시시할 것같고 지루할 것같고 뻔할 것같아서. 그런데 그런 별 볼일없는 이야기를 이 영화의 감독과 배우들 - 특히 미츠시마 히카리! '그런데도 살아간다'에서도 완전! '악인'에서도 완전! 매력적인 여배우 발견♡ -은 참 재미나게도 만들어주셨다. 능력자들같으니라고.
원래 리뷰쓰면서 스포일러?랄까 내용 전부를 읊어버리는 건 조심하며 피하는 편인데, 어쩌다보니 다 말해버렸네.. 흥분했나?ㅎ 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저 거대하고 엄청 달콤한 수박에 관해서는 함구하기로.
마지막은, 울적할 때 틀어보곤 하는 이 영화의 황당하면서도 코믹한 명장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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